역사적인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테르모필레 전투는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100만 군대에 맞서 싸운 전사 300명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300은 테르모필레 전투를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 중동부에 위치한 테르모필레는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꼭 점령해야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폭이 굉장히 좁아서 공격하기 까다로운 땅이었고 그리스 아테네의 책사였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러한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방어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그리스 진영에서 배신자가 발생하면서 페르시아에 우회로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이를 이용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군대의 뒤쪽을 기습하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그리스의 장군이었던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병사는 모두 사망하게 되었고 이 전쟁은 영화 300의 배경이 됩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 전쟁
헤로도토스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책으로 기록한 역사가입니다. 그는 역사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간에 전쟁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을 기록했고 이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전쟁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했고 전쟁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기록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후 개인적인 사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 서술합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이 발생한 원인이 소아시아 지역의 지배권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는 소아시아 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이 중 일부 지역을 페르시아가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지역 사람들이 그리스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지만 페르시아 군이 승리하며 제압당하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복종하라고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면서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1차 전쟁은 그리스가 승리하면서 방어에 성공하는데 후대 사람들에게 마라톤 전투라고 전해집니다. 2차 전쟁은 페르시아의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합니다. 헤로도토스는 500만명 이상의 군인이 출정했다고 기록했지만 최근 역사학자들은 실제로는 50만명 정도가 전쟁에 참여했을 거라고 예측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를 격파하고 승리했지만 살라미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후퇴합니다. 이후 마지막 전투에서도 패배하면서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스 또한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를 공격했으나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고 BC 448년 전쟁은 끝이 납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페르시아를 상대로 분전했고 결국 방어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서술했습니다.
투키디데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BC 430년 그리스 아테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이 병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는데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아테네로 퍼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항구도시라는 특성상 인파가 몰리는 도시였고 이 과정에서 전염병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더욱 성장하는데 특히 학문, 예술, 건축과 관련된 산업들이 발전합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건축물은 파르테논 신전으로 아테네의 수호신을 위해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C 433년에 아테네는 또 한 번의 전쟁을 경험합니다. 케르키라와 코린토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아테네가 케르키라의 편을 들면서 참전한 것입니다. 당시 아테네의 해상 교역 독점에 불만이 있었던 코린토스는 주변 국가들과 연합해 저항합니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게 된 원인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테네의 왕인 페리클레스는 백성들에게 안전한 도시 내부로 피신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도시 내부로 수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문제는 전염병이 퍼지기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감염되면서 아테네 군대의 4분의 1이 사망했고 사기가 꺾이게 됩니다. 결국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합니다. 투키디데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아테네가 성장하는 과정과 전염병으로 인해 몰락하는 이야기를 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을 편찬합니다. 투키디데스는 당시 아테네의 왕이었던 페리클레스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전쟁 당시 선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군중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적극적으로 개입해 대중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조국인 아테네가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책은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결말을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비록 미완성된 결말의 역사책이지만 해당 시대를 연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해당 역사서가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주관도 섞어서 역사책을 편찬했지만 투키디데스는 자기 생각은 배제하고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만 서술했습니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아테네가 전쟁 중에 했던 잘못된 행동과 실수, 패배의 원인에 대해서도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신화 속 이야기까지 역사에 포함해 기록했지만 투키디데스는 정치와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만 역사로 분류하여 분석하고 기록했습니다.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 투키디데스는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이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줍니다.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트로이의 장군이었던 아이네이아스는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후퇴하던 도중 이탈리아반도에 도착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정착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알바산으로 정착지를 옮기고 알바롱가 왕국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나라를 건국합니다. 또한 테베레강 상류 쪽에 수도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 도시의 이름이 로마입니다.
로마는 초장기에는 왕정 체제로 왕의 권력이 강했지만 독재에 대한 부작용과 반감이 심해지면서 공화정 체제로 변화합니다. 공화정은 다수의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며 통치하는 체제를 말하는 데 구체적으로는 집정관, 평민회, 원로원으로 구성됩니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이러한 공화정 체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한 로마사라는 책을 편찬합니다. 이 책은 총 142권으로 구성되었지만 대부분 소실되면서 현재는 35권만 남아있습니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공화정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세력 간의 조화와 공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정관, 원로회에 소속된 귀족들과 평민회에 속한 평민들 사이의 조화와 공존은 로마가 번영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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